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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영웅

  1. 호국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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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 호소령1931. 7. 2 ~ 1966. 8. 11

월남전을 말할 때 이인호 소령을 먼저 말하지 않는 것은
해병대 정신에 대한 결례다

  • 월남전서 수류탄 껴안고 산화
  • 부대원 살려낸 희생정신, 꺼지지 않는 ‘살신성인의 혼’
'얼마나 조국을 사랑했기에 / (생략) / 아~아! 스스로 장렬한 죽엄을 하였던가? / 그대몸은 부서져 가루가 되고 / 피는 흘러 이슬이 되었거니' 한솔 이효상 선생의 '해병 소령 이인호를 추모하며'의 한 부분이다. 1966년 여름. 대한민국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이인호' 이름 석자에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베트남 전쟁, 이른바 월남전이 절정에 달했던 1966년. 그해 8월 11일 베트남 푸옌성 투이호아의 한 대나무 숲 동굴은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전날 해풍 작전을 벌여 체포된 베트콩이 이 동굴에 자신의 동료들이 숨어있다고 털어놨기 때문이다. 당시 청룡부대 3대대 5중대장으로 파견된 이인호 해병 대위는 동굴 안을 직접 살펴보기로 했다. 작전 중에 이미 한차례 동굴의 출입구를 폭파하고 탐색조를 꾸려 수색했으나, 그곳에선 베트콩의 수류탄과 실탄만 발견되었다. 게다가 베트콩 포로의 진술과도 엇갈리는 부분이 많았다.

대대 참모였던 이 대위는 뒷짐지지 않았다. 오히려 최선두에서 탐색조 4명을 이끌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ㄱ'자로 꺾여있던 동굴 모형을 확인하면서 수색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갑자기 한 베트콩이 나타나 수류탄 한 발을 던지고 달아났다. "엎드려!" 이 대위는 다급하게 외쳤다. 재빨리 수류탄을 집어 들고 베트콩 쪽으로 힘껏 던졌다. 하지만 또다시 수류탄 한 발이 날라왔다. 부대원들의 바로 옆에 떨어졌다. "수류탄이다!" 폭발 직전이었다. 이 대위는 수류탄을 온몸으로 덮었다. '펑'. 그의 나이 34세였다. 부대원들은 무사히 살아 돌아왔다. 그는 국민의 가슴 속에 영웅으로 남았다.

이인호 소령은 경북 청도군 출신이다. 청도초등학교와 대구 대륜고등학교를 다니고, 해군사관학교 11기로 들어갔다. 1953년 졸업한 뒤 해병 소위로 임관, 해병대 제1사단 수색 중대장을 거쳐 1965년 월남전에 참전했다. 이 소령은 1남 1녀의 어린 자녀를 뒀다. 베트남에서 가족들에게 볼펜으로 편지를 적어 보내는 등 가정적이었다. 그가 전사한 뒤 정부는 1계급 특진과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 미국에서도 은성무공훈장을 수여했다.

국민의 애도와 추모의 물결은 한동안 이어졌다. 이 소령의 유족을 위해 당시 100만원 모금 운동이 벌어지고, 그의 모교인 대륜고교에서는 기념비를 세웠다. 해군은 부하와 동료의 목숨을 건진 의로운 죽음으로 군인정신의 표상이 된 이인호 소령의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지난 1967년 해군사관학교에 동상을 세워 해마다 '이인호제'란 명칭으로 추모제를 지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