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호국영웅

  1. 호국영웅
  2. 호국영웅

김 점 곤장군1923. 4. 15 ~ 2014. 9. 28

다부동 전투의 영웅, 낙동강에서 평양까지 ‘후퇴·역전·승리’

  • 특공대 구성, 날씨 활용 등 다부동 위기를 기회로
  • 북한 방어선 뚫고 평양 입성한 한국군 제1호 연대장
'남북의 충돌이 점차 격렬해졌다. 대립은 결국 전쟁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몇 달뒤 조국은 전란에 휘말렸다. 조국 땅에서 같은 민족끼리의 비극이었다.' 김점곤 장군은 지난 2010년 8월 한 언론사의 인터뷰에서 6·25전쟁을 이렇게 회고했다. 또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상이 타결된 날을 '오후 2시 거짓말처럼 총성이 멈췄다. 고지 너머 북쪽을 바라보는데, 말할 수 없는 허탈함에 가슴을 감쌌다'고 기억했다.

김 장군은 '다부동 전투의 영웅'으로 불린다. 1950년 8월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까지 밀고온 북한군과 맞서게 된 건 제1사단 제12연대장이었던 김 장군은 한 달 동안 이 지역을 무조건 지켜야 했다. 낙동강 방어선은 한국군이 지켜야할 전부였기 때문이다. 김장군은 지형과 날씨를 활용해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2연대 대원들로 특공대를 구성해 북한군의 전차를 부수는 등 수차례 승리의 깃발을 올렸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는 토대를 다진 것이다. 이 다부동 전투는 훗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의 파리를 지키기 위해 연합군이 펼쳤던 '베르뎅 전투'에 비유됐다. 그만큼 처절하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전투로 기록됐다.

9월 25일부터 제1사단은 유엔군과 함께 반격을 시작했다. 그는 모든 사항을 사전에 꼼꼼하게 점검했다. 충북 보은군과 청주군, 경기도 안성을 거쳐 경기도 연천군 고랑포로 쉴새 없이 올라갔다. 다음 달 11일 마침내 38도선을 넘고 평양탈환작전에 들어갔다. 북한군에게 여유를 주지 않았다. 철두철미한 그의 계획은 한국군에 승리의 깃발을 안겨줬다. 일주일 뒤 강원도 춘천시 대동리를 점령, 북한군의 3차 방어선을 뚫고 19일 오전 11시 평양시 동구 선교리에 들어갔다. 한국군에서 제일 먼저 평양에 입성한 제1호 부대가 됐다.

김점곤 장군은 육군사관학교 1기생이다. 서울 중동에서 태어난 김장군은 23세 때 육군 소위로 임관됐다. 6·25전쟁의 막바지인 1952년 9사단장에 임명됐다. 빨치산 토벌과 2군단 재창설, 1야전군 출범 등 육군 발전에 힘을 실었다. 이러한 공로로 태극무공훈장 (1953년)을 비롯해 을지, 충무, 화랑무공훈장 등을 받았다.

전역한 뒤 경희대학교 교수, 부총장까지 올랐고, 안보 및 국제문제연구소 소장과 평양연구원 원장 등 6·25전쟁 전문가로 연구 활동을 펼쳤다. 전쟁터에 청춘을 바친 그는 91세에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