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해 동하사1931. 11. 22 ~ 1952. 9. 13
방아쇠 당긴 채 전사 ‘수도고지의 얼’
- 연대서 기관총 명사수로 활약
- 그의 손가락은 끝까지 방아쇠에…
수도고지는 막바지 휴전 협상을 앞두고 적군과 우리 군이 서로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기 위해 2개월 넘게 수차례나 빼앗기고 빼앗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한 달에 14만여 발의 포탄이 우박 쏟아지듯 이곳에 집중 사격 됐다. 고지 높이는 600m 채 되지 않았다. 고지의 동북쪽은 비교적 완만한 능선이 많이 퍼져있어 북한군의 접근이 쉽지만 남쪽으로는 급경사로 능선이 하나밖에 없었다. 적군을 관측하기 좋은 요충지였다.
1952년 9월 13일 새벽 1시 15분. 강원도 금성군 임남면 수도고지 하늘에 한 발의 녹색 신호탄이 쏘아올려졌다. 북한군과 손잡은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공해동 하사는 자신의 경기관총을 고쳐잡았다. 모래와 포연으로 눈을 뜨기조차 힘들었다.
수도사단 제26연대 제1대대 기관총사수인 공 하사는 고지의 서북쪽을 맡았다. 중공군이 공 하사의 부대로 들어오는 길은 다섯 가지였다. 평소와 달리 한 접근로마다 중대 이상의 중공군 돌격 부대가 쳐들어왔다. 돌격 부대는 중기관총을 설치했다. 경기관총 1정과 중기관총 3정의 대결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주변에서 동료들이 총탄에 맞아 숨져갔다. 공 하사는 무조건 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거의 몸통을 드러내놓고 기관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그의 어깨에 총탄이 뚫고 지나갔다. 하지만 끝까지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빼지 않았다. 결국, 중공군의 중기관총 3정을 모두 부순 그는 여러 군데 총상을 입고 쓰러져 그 자리에서 그대로 숨졌다. 그의 손가락은 여전히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현재 그는 '수도고지의 얼'로 불린다.
공해동 육군 하사는 대구 달성군 하빈면 봉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연대에서 경기관총 명사수였다. 점발과 연사를 자유롭게 조정하는 그의 사격 솜씨는 연대장도 감탄할 정도였다. 수도고지 방어 임무를 맡은 그는 적의 공격을 지연하거나 저지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1952년 5월 정부에서는 공 하사에게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수도고지 전투는 쌍방 모두 수 천명의 사상자를 냈다. 당시 국방부 장관은 이례적으로 수도사단 장병들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특별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