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동 빈장군1923. 3. 22 ~ 2002. 2. 1
수적 열세를 전술로 극복한 명장, 한국군 사기 드높여
- 영천 전투서 안개 이용 기습 작전
- 과감한 지휘와 벼랑끝 전술
1950년 8월 14일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에서 귀를 찢는 듯한 총성과 포성이 울렸다. 퀴퀴한 냄새와 검은 연기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사방은 붉은 피로 물들었다. 북한군의 공격에 맥없이 밀려내려온 한국군은 낙동강 최후 방어선만 남겨두고 있었다. 속도전을 펼쳤던 북한군은 한반도를 수중에 넣을 고지를 앞두고 벌겋게 달아올랐다. 한국군은 물러 서지 않았다. 이곳에서 처절한 다부동 전투가 벌어졌다.
이날 오후 의성군 신주막 주변에서 국군 제1사단 제11연대는 4시간 동안 북한군과 치열한 백병전을 벌였다. 북한군은 탱크(전차)를 앞세워 공격해 왔다. 제11연대장이었던 김동빈 장군은 과감한 지휘와 최후의 벼랑끝 전술을 내세웠다. 한국군은 로켓포 특공대를 선두로 육박 돌격전을 펼쳤다. 밤낮으로 서로가 뒤엉켜 피눈물로 일궈낸 승리였다.
김 장군은 이 기세를 밀어붙였다. 그의 전술은 영천 전투에서도 빛났다. 북한군에 대구까지 뺏길 위기에 처하자 경북 영천 주변에서 제11연대는 지원에 나섰다. 북한군보다 한국군은 수가 훨씬 적었다. 영천은 때마침 비가 내려 안개가 짙게 깔렸다. 김 장군은 북한군이 시야 확보에 어려움을 겪자, 이 틈을 활용해 북한군의 진지에 수류탄을 몰래 던졌다. 북한군이 우왕좌왕하자, 총검을 휘두르며 육박전을 벌였다. 이 영천 전투는 후퇴를 반복하던 한국군에게 사기를 심어줬다.
김동빈 장군은 한국전쟁이 터진 그 해, 해평리 작전(1950년 8월 3일)에서 북한군의 2개 사단 절반을 무찌르는 큰 공을 세웠다. 이어 유엔군과 한국군의 반격이 시작되던 9월부터
평양탈환작전(10월 19일)과 평안북도 태천 전투(11월 26일), 1951년 임진강에서 벌어진 적성 전투(소위 임진강 전투, 4월 22일) 등에도 참전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모두 대한민국 육군의 굵직한 전투이다. 1953년 8월 제1사단장이었던 그는 정부로부터 군 최고의 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김 장군은 함경북도 길주군 덕산면에서 태어났다. 중국 만주의 용정 중학을 졸업하고 해방 후 육군사관학교 제1기로 군에 들어왔다. 23세가 되던 1946년 6월 육군 소위로 임관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