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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영웅

  1. 호국영웅
  2. 호국영웅

김 옥 상일병1928. 7. 15 ~ 1950. 11. 6

1개 소대와 맞선 ‘한국전 시라소니’

  • 중공군과 대결 첫 승리, 비호산 전투 참전
  • 단신으로 적군 소대와 사투
'흡.' 화들짝 놀라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숨소리까지 집어삼켜야 했다. 중공군과 눈이 마주쳤다. 생각보다 훨씬 짜릿하고 담담했다. 쳐들어가거나 막아섰던 전투를 수차례 겪었지만, 중공군의 진지를 몰래 살펴보다 걸린 적은 처음이었다. 한순간 머리카락이 쭈뼛섰다. 동시에 힘껏 주먹을 쥐었다. 중공군이 한둘씩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뒷걸음칠 수 없었다. 최대한 한 명이라도 더 무찔러야겠다고 되뇌었다.

1950년 11월 6일 평안남도 개천군 비호산. 지난 일주일 동안 산기슭 곳곳은 피로 얼룩졌다. 한국전쟁이 발발된 뒤 북한군에 밀리던 한국군은 인천 상륙작전 등을 성공적으로 해내면서 전세를 뒤집었다. 그러나 중공군이 북한을 도와주기 위해 나서자, 한국군은 상대적으로 병력이 매우 약해졌다. 비호산 고지를 둘러싸고 치열한 전투가 계속됐다. 이날 오전 8시 제7사단 제5연대 소속 김옥상 일병은 적의 움직임과 병력 등을 파악하기 위해 중공군의 전초진지에 혼자 다가갔다. 진지를 유심히 둘러보던 찰나 중공군의 한 소대와 맞닥뜨렸다. 김 일병은 단신으로 결사적인 육박전을 벌였다. 그는 혼자 여러 명의 중공군을 물리치는 전과를 올리고 장렬히 전사했다. 22세 청년은 이렇게 나라에 목숨을 바쳤다.

김옥상 일병은 대구시 남구 봉덕동 출신이다. 1950년 8월 24일 육군에 입대했다. 한국전쟁에서 소총수로 11월 1일부터 6일까지 개천 비호산 주변 전투에 참전했다. 나라를 위한 그의 희생정신은 한국군과 유엔군의 사기를 높였다. 그가 숨진 뒤 곧바로 미군 제1군단 포병이 힘을 보태 진지를 지키는데 성공했다. 또 청천강에 교두보를 확보하면서 비호산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954년 6월 25일 정부는 김 일병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그는 현재 국립서울 현충원 사병 30묘역에 잠들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