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제 근이등상사1930. 1. 14 ~ 1950. 9. 17
반격의 근간 ‘형산강 전투’ 일등 공신
- 총알이 뚫고 간 왼쪽 어깨로 형산강 도하
- 20살 분대장, 기관총 진지 초토화시키고 눈 감아···
1950년 9일 17일 새벽 4시 경북 포항 형산강 서쪽 강가. 수십 발의 총성이 새벽의 고요함을 깼다. "잠수!" 가슴까지 차오른 물살을 헤치며 제3사단 제22연대 1대대 1중대 소속 연제근 분대장이 짧게 외쳤다. 연제근 분대장을 따라 한국군 12명이 강바닥에 엎드려 북한군의 기관총 진지로 다가갔다. 몸에는 탄띠를 두르고 군복의 멜빵 가득히 수류탄을 채웠다. 숨이 차면 머리를 물 밖으로 내밀어 공기를 마셨다. 한국군을 발견한 북한군의 기관총은 쉴틈 없이 불을 내뿜었다. 빗발치는 총탄과 수중 숨바꼭질이 시작됐다.
지난달부터 동해안을 따라 사정없이 공격해온 북한군이 포항까지 점령했다. 낙동강 방어선에는 초비상이 걸렸다. 그나마 하루 전인 16일 인천상륙작전을 펼치면서 전세가 뒤바뀌기 시작했다. 북한군이 동요하는 사이 연제근 분대장은 포항을 탈환하기 위해 형산강 도하작전을 강행했다. 형산강을 건너는 다리는 형산교 단 한 곳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한발, 두발 그리고 세발. 강을 건넌 연 분대장이 북한군의 진지에 힘껏 수류탄을 집어 던졌다. 물속에서 이미 그의 왼쪽 어깨는 총알을 뚫고 간 상태였다. 연 분대장과 함께 북한군 진지에 땅을 밟은 대원은 3명 뿐이었다. 북한군은 연 분대장을 향해 사정없이 총을 쐈다. 기관총 진지가 수류탄이 터지면서 초토화되자 연 분대장은 그제야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20세였다. 그가 세운 공은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한국군이 서울을 되찾고 압록강까지 북진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이 전투에서 숨진 연 분대장에게 정부는 2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1950년 12월), 화랑무공훈장(1951년 8월), 무공포장(1956년 10월)을 추서했다.
연제근 이등상사는 충북 증평군 도안면에서 태어나 도안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1948년 1월 국방경비대에 입대했다. 그는 1949년 제3사단 제22연대 1대대 1중대 대원이었을때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에 참전해 공산당의 유격대원 9명을 잡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때에도 2계급 특진했다.
그의 희생정신은 전국 곳곳에 남아있다. 경북 포항시는 남구 해도근린공원에 연제근 상사 조각상을 세우고, 매년 이곳에서 '형산강 도하작전 전몰용사 추념식'을 연다. 그의 고향인 충북 증평군은 2015년 5월 도안면에 '연제근 공원'을 조성하고 높이 3m의 동상을 세웠다. 육군본부는 20년 이상 계속 근무한 부사관에게 주는 '호국헌신상'의 명칭을 2011년부터 '제근상'으로 바꾸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