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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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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치 곤장군1927. 7. 17 ~ 1965. 1. 1

조국 하늘에 목숨 건 25세 청년 “대한민국 공군에 포기란 없다”

  • 한국 전쟁 203회 출격 기록, 승호리 철교폭파 일등 공신
  • 영화 ‘빨간마후라’ 실제 주인공
"브라보, 브라보! 우리가 해냈어!" 1952년 1월 15일 동이 틀 무렵, 미 제5공군 합동참모본부에서는 환호의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북한군의 후방보급로인 승호리 철교가 폭파돼 두 동강이 났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2년째, 유엔 공군이 36차례나 시도했다 실패한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을 대한민국 공군이 세 번째 출격 만에 성공해낸 순간이었다. 몇 시간 뒤 전투 조종사 유치곤 장군이 F-51 전폭기를 몰고 본부로 돌아왔다. "대한민국의 공군에게 포기란 없습니다." 유 장군의 첫 마디였다. 당시 25세였던 그의 목에는 공군의 상징인 빨간 마후라가 걸려있었다.

평양에서 대동강 물줄기를 따라 나있던 승호리 철교는 북한군이 군수물자를 중동부 쪽으로 수송해주는 핵심 요충지였다. 전폭기가 1.2㎞(4천피트)의 상공에서 457m(1천500피트)까지 하강해 철교에 폭탄을 투하하는 공격을 해야 했다. 적의 치열한 미사일 공격도 모두 피해야 했다. 이 공적을 인정받아 미 공군은 유 장군에게 미국 공군 비행훈장을 수여했다.

유치곤 장군은 대구 달성군 유가면 출신의 호국 영웅이다. 1951년 4월 공군 소위로 임관했다. 같은 해 10월 11일 강릉 기지에서 미 공군으로부터 지원받은 F-51 전폭기를 몰고 출격했다.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과 351고지 탈환작전, 송림제철소 폭격작전 등 주요 작전에 참여했다. 이때 '불사조'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53년 5월 30일까지 전쟁 중에 203회를 출격했다. 200회 이상 출격한 기록은 한국 공군 역사상 그가 유일하다.

유 장군은 전쟁이 끝나고도 전후방 전투지휘관을 맡아 임무를 수행했다. 1965년 1월 1일 38세의 나이에 대구의 제107기지단장으로 재직 중 과로로 순직했다.

그는 1964년 신상옥 감독이 공군의 위상을 담아낸 영화 '빨간마후라'의 모델이기도 하다. 유 장군의 고향인 달성군 유가면에는 2005년 6월 유치곤장군 호국기념관이 세워졌다. 이곳에는 그의 유품과 비행기 모형, 전투기 변천사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또 대구지방보훈청은 달성군과 함께 6월 유가면의 일부 도로를 '유치곤 길'로 지정해 표지석을 세웠다.